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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회복, 중독없는 경상남도
먹방, 스마트폰, 게임, 쇼핑, 섹스, 술, 약물….
무언가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는가. 이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지만 도무지 끊어내기 어려운가. 당신만 그런 건 아니다. 지금 이 시대 많은 이들이 그렇다. 탐닉하는 대상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도파민네이션’(흐름출판)은 미국 스탠퍼드대 정신건강의학·중독의학 교수인 애나 렘키가 실제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중독으로 인한 쾌락과 고통의 관계를 설명하고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치료한 과정을 정리했다. 국내에서는 2022년 3월 출간된 후 올해 4월 현재까지 20만 명이 넘는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 이상이다.) 쾌락을 느끼는 과정에 관여하는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을 다룬 많은 책들 중 ‘도파민네이션’이 유독 큰 관심을 받는 이유는 뭘까.
‘도파민네이션’ 편집자인 신성식 흐름출판 편집부 부장(45)을 서울 마포구 흐름출판에서 3일 만났다. 신 부장은 “‘도파민네이션’이 호응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더 크다”고 했다.
책 앞표지에는 ‘아마존닷컴 1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1위’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해외에서 반향이 컸다면 국내에서도 잘 팔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신 부장은 “외국 책의 판권을 구입하는 시기는 해외에서 책이 출간되기 전이다”라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한국보다 10개월 가량 먼저 책이 나와 현지 독자 반응을 앞서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사랑받았다고 해도 독자들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국내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신 부장은 “다만 유발 하라리,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팬층이 두터운 세계적인 작가들이 신경 써서 쓴 신작은 예외기에 판권을 사기 위한 출판사 간 경쟁이 치열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도파민네이션’이 출간된 후 화제가 된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다른 외국 책과 마찬가지로 ‘도파민네이션’ 역시 6페이지 분량의 제안서를 검토한 후 출간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렘키 교수의 책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기에 제안서의 내용과 그의 이력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 편집자의 안목이 중요한 상황이었다.(렘키 교수는 2016년 미국에서 ‘마약상, MD: 어떻게 의사들은 사기를 당하고 환자들은 걸려들며, 왜 그것은 멈추기 어려운가’를 출간한 적이 있지만 미국에서 주목받는 저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신 부장은 먼저 저자의 전문성을 살폈다.
“저자가 해당 분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지 봤습니다. 렘키 교수는 스탠퍼드대 교수로 스탠퍼드 중독치료센터를 이끄는 등 20년 넘게 중독 분야를 연구했다는 점에서 전문성을 인정할 수 있었죠.”
저자가 현장을 실제 경험했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요즘 독자들은 저자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한 책보다는 저자가 현장에 뛰어들어 ‘플레이어’로서 직접 겪은 이야기에 훨씬 관심을 가집니다. 렘키 교수는 연구를 하면서 환자 상담 치료를 계속해 왔고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책에 담았죠. 환자 뿐 아니라 자신이 로맨스 소설에 중독됐던 사실까지 털어놓아 독자들이 더 실감나고 가깝게 느끼게 했습니다.”
사례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죽 이어가는 ‘스토리텔링’이 돼 있는지도 점검했다.
“각각의 사례들이 단순한 케이스로 단절돼 소개되는 것보다는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를 갖춰야 독자들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소설 장르가 아니어도 독자들은 색다르게 읽히는 것을 원하는데 이야기는 이런 힘을 갖고 있거든요.”
책에는 레코드 플레이어와 코일로 자위 기계를 만들어 틈날 때마다 자위 행위를 하는 60대 남성, 마리화나에 중독된 10대 소녀, 약물에 중독된 20대 남성, 폭식을 하고 수면제와 기침약, 술 등을 섞어 먹는 30대 여성 등의 사례가 자세하게 나온다. 중독에 빠진 계기와 해당 행동을 할 때의 기분, 그 이후 몰려드는 후회, 이를 끊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까지, 이들이 한 말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치료 과정도 꼼꼼하게 담아 각 인물의 삶과 심리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환자들에게는 허락을 받고 썼다.)
신 부장은 “전문성, 플레이어, 스토리텔링은 흐름출판이 추구하는 기준으로, ‘도파민네이션’은 이를 모두 충족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런 요소를 다 갖춰도 실제 책에 담긴 내용이 독자에게 다가가야 선택받을 수 있다. 저자는 중독이 일어나는 건 사람들이 힘든 현실을 잊으려 쾌락에 점점 빠져들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중독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삶을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모두 너무나 비참한 이유는, 비참함을 피하려고 너무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는 저자의 분석에 “가슴이 와 닿는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중독이 고통을 가져오는 이유도 짚는다. 쾌락과 고통은 뇌의 같은 영역에서 처리되며 대립 작용을 통해 기능한다. 저자는 이를 ‘쾌락과 고통은 저울의 서로 맞은편에 놓인 추처럼 작동한다’고 비유했다. 저울은 수평 상태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쾌락을 과하게 느끼면 반사 작용처럼 균형을 잡으려는 자기 조정 매커니즘이 일어나 고통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다. 쾌락에 노출될수록 뇌의 균형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 쪽으로 기울하다 결국에 저울 자체가 망가지고 만다고 경고한다.
각 환자들의 사례를 읽다보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자위 행위에 중독된 남성에게는 자위 기계를 쓰레기통에 넣고 이를 되찾아 올 수 없게 폐기장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가 쓰레기통에 기계를 버렸다가 다시 꺼내 만드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또 그가 참여하고 있는 섹스 중독 치유 모임의 멤버에게 전화해 이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저자도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시작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포함한 각종 로맨스 소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자책 단말기를 치웠다.
추천사도 힘을 발휘했다. 신 부장은 여러 사람에게 추천사를 받기보다는 가장 적합한 한 명에게만 받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고민 끝에 두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만큼 뇌과학자가 좋겠다고 결정했다. 인지도가 높으면서도 전문성 있는 인물을 찾았다. 정재승 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였다. 정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도파민으로 버텨는 현대인을 위한 인간, 뇌, 중독 그리고 회복에 대한 안내서’라는 문구가 담긴 추천사를 보내왔다.
“책을 ‘피로사회’와 연결지은 내용을 보고 무릎을 쳤어요. 독자들이 책 내용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니까요. 책을 만드는데 파묻히다 보니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했는데, 정 교수님이 큰 그림을 짚어주신 거죠. ‘추천사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셨어요.(웃음)”
미국에서 데이터과학자로 일하는 한국인 유명 유튜버 ‘돌돌콩’이 지난해 저자를 화상으로 인터뷰한 영상이 조회수 79만 회를 올리며 화제를 모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책이 꾸준히 나가던 중에 영상이 올라오자 서점에서 주문이 몰리면서 판매 순위가 역주행하기 시작했어요. ‘스마트폰 중독 때문에 힘든데 내게 필요한 내용이다’는 댓글도 줄줄이 달렸고요. 해외 저자 중에서는 인터뷰를 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렘키 교수는 대가 없이 인터뷰했어요. 배구 선수 김연경 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책을 소개한 것도 도움이 됐고요.”
해외 책은 번역도 매우 중요하다.
“편집자로 일했던 김두완 번역가가 쉬운 단어로 문장을 길지 않게 정리했어요. 소리 내어 읽었을 때 편하게 들리도록 번역해 달라고 당부했는데, 이를 잘 반영했고요. 요즘 독자들은 구어체처럼 술술 잘 읽히는 걸 선호하거든요.”
책 제목은 원제 ‘Dopamine Nation’을 그대로 사용해달라는 저자의 요청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중독 문제가 공론화되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짜릿한 장면에 ‘도파민 터졌네!’라는 자막을 달 정도로 도파민이라는 단어가 친숙해진 것도 원제가 바로 이해될 수 있는 요인이 됐어요.”
중독을 끊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책을 내달라는 요청이 이어지자 렘키 교수는 ‘30일만에 스마트폰 끊는 법’ 등 많은 이들이 겪는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체크리스트를 담은 책을 올해 10월경 낼 예정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특정 사안이 자신과 관련돼 있는지 여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개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높고요. 과학 철학 등 전문 분야에 기반을 두면서 독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를 다루는 책을 계속 선보이고 싶습니다.”
* 출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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