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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회복, 중독없는 경상남도
30세 청년 ‘금곡 조’(활동명)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일부 참가자는 눈물을 보였다. 지난달 16일 오후 8시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사무실에서 열린 한국단도박모임(Gamblers Anonymous) ‘가락 목요모임’의 한 장면이다. 단도박모임은 전세계적인 도박중독자 자조모임으로, 한국에선 40여개 지부에서 600여명의 익명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협심자(協心者)’라고 부른다. 도박중독을 끊어내기 위해선 서로 마음을 합치고 격려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에 사는 ‘금곡 조’는 이날 모임에 처음 나왔다. 그는 “가족들에게 도박을 끊겠다고 수없이 약속했는데 지난주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10만원으로 불법 온라인 스포츠 도박을 했다”며 “처음에 100만원을 땄다가 나중엔 전부 잃게 됐다”고 털어놨다. 가족들은 그에게 “같이 못 살겠으니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는 이 모임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도박중독을 끊는다는 생각으로 오게 됐다. 소액결제도 못 하게 휴대폰 명의를 가족에게 이전했다. 불법 온라인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기 위해 기기도 스마트폰에서 2G폰으로 바꿨다”고 울먹였다. 다른 협심자들은 “잘했습니다”란 격려와 함께 큰 박수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개인 의지로 도박의 유혹을 뿌리치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조씨 사례처럼 아무리 다짐해도 다시 손을 대는 사례가 흔하다. 게다가 불법도박 시장의 급성장으로 중독자 수는 237만명(추정치)을 돌파했다. 체계적인 치유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국내 도박 치유 인프라에는 구멍이 많다.
도박중독 치유 업무는 사행산업통합감시위원회(사감위) 산하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치유원)이 맡고 있다. 전국에 15개 센터를 운영 중인데, 상담을 받기 위해 2달 넘게 기다려야 하는 곳도 많다. 최근 이곳에 상담 신청을 했다 대기 통보를 받았던 청소년이 사흘 만에 도박비 마련을 위해 중고나라 사기에 가담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도박중독자들 사이에서 국내 최장기간(37년 4개월째) 단도박을 실천 중인 것으로 유명한 권모(84)씨는 “불이 나면 1초라도 빨리 진화해야 하는 것처럼, 도박중독도 최대한 빨리 상담 등의 조치를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박 치유 예산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사감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치유원 예산은 2021년 231억여원에서 올해 217억여원으로 줄었다. 2019년과 비교해도 16억여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치유원 예산은 국내 합법 사행산업의 매출 일부로 만들어진다. 사감위법 14조의2에 “1000분의 5 이하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율에 해당하는 중독예방치유부담금을 부과·징수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에서 치유원에 배정해주는 액수만큼만 사업비로 책정해 사용할 수 있고, 나머지는 기금처럼 쌓아둬야만 한다. 치유원이나 사감위 측에서 예산 부족을 호소해도, 기재부의 허가가 없이는 사행산업자들의 법정부담금도 다 쓸 수 없는 구조다.
도박 중독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 심리상담 전문가는 “강원랜드만 해도 1조원 넘는 수익을 올리지만, 치유원 예산으로 쓰이는 돈은 극히 일부(0.5% 이하)”라며 “특히 민간상담기관 연계 예산은 지난 9월 다 소진돼서 10월부터는 자체상담만 가능한 상황이다. 대기기간이 더 길어졌다. 해마다 반복되는 문제”라고 안타까워했다.
치유원에서 일했던 상담사들도 “예산 부족 때문에 정상적인 상담이 어려운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2014년부터 6년간 치유원 광주센터에서 근무한 박철희 온도심리상담센터장은 당시 1년에 100명 가까운 신규 내담자들을 받았다고 한다. 지역별로 하나뿐인 치유원 센터로 사람들이 몰리며 대기시간이 2달 가까이 됐고, 조금 더 빨리 받으려 왕복 4시간을 이동하는 내담자도 많았다. 그는 “센터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 상태”라며 “12번으로 상담을 제한하다 보니 도박 중독이 치유되는 걸 보는 상담사가 손에 꼽힌다. 상담사 입장에서는 ‘중독은 치유가 안 되는구나’라는 무기력함에 빠지고, 야근과 주말 근무를 번갈아 하다보니 상담 질 관리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센터에서 10년간 일했던 최경수 헤르츠심리상담센터장도 “촘촘하게 센터를 늘려 치유 접근성을 높이는 게 가장 좋지만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며 “치유원을 관리하는 사감위나 문화체육관광부에 ‘중독 상담’ 전문가가 부재하고, 이 때문에 중독 상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상담 질보다는 이용자 수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도박 중독, ‘병’으로 인식하지 않는 시각 문제”
세계보건기구(WHO)는 도박 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개념 정립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해국 가톨릭대학교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도박은 질병임에도 국가 의료 체계와 동떨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게 가장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 치유원의 15개 센터 중 병원과 연계된 곳은 제주 센터 단 1곳이다. 치유원의 강지언 제주센터장은 “정부가 정한 4대 중독(마약·도박·알코올·인터넷) 중 다른 중독은 보건복지부가 관할하면서 유독 도박 중독은 산업으로 분류해 문체부 소관”이라며 “산업 측면에서 보다 보니 치료라는 보건학적 개념을 간과한다”고 말했다.
도박 중독의 주원인인 불법 도박 감시 영역 역시 구멍이 뚫려있다. 불법도박 사이트 심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감위 불법사행산업감시신고센터 관계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신고해도 사이트 차단에 2개월 이상 걸려 효과가 없다”며 허탈해했다. 지난해 방심위의 불법도박 사이트 심의 건수는 5만 161건에 달하지만, 담당 직원은 단 3명뿐이다. 업무 처리가 늦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불법 도박 업체들은 이런 단속의 허점을 노려 복제 사이트를 만들어둔 채 회원들을 관리한다. 사감위에 따르면, 한 유명 불법 도박 사이트는 1만 3000개의 복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도박 중독 문제를 해결하려면 처벌과 예방 교육을 함께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선중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사전에 도박 중독 위험성을 경고 받은 청소년들은 도박 중독에 내성을 가진다는 연구 결과가 꽤 있다”며 “예방 접종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효과적인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윤혜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확률형 아이템 등 사행성을 이용한 산업들이 대량 생겨났지만 개인들의 경각심은 낮다. 온라인 도박과 모바일 게임 사이 경계가 불분명하다”며 “이런 상황에선 청소년 시기부터 중독 위험성을 인식할 수 있게 사회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혜연·김민중·손성배 기자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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